추석이 지나니 몸도 마음도 노곤하다. 이럴 때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왔으면 싶다. 아내들 대부분의 로망은 여행이다. 아이 키우랴 집안일 하랴 힘들고 지치면, 그게 이루어지지 않을 꿈인줄 알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신문 하단의 여행 광고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까닭이다.
한 단체에서 남편 퇴직을 앞둔 아내들에게 ‘남편 퇴직 후 가장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앙케트를 했다. 아내들의 첫 번째 소망은 ‘퇴직금 잘 간직하고 남편과 함께 여행을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나도 수없이 꾸어온 꿈이다. 아름다운 스위스, 역사가 깃든 스페인과 이탈리아도 가보고 싶고 아프리카 여행도 리스트에 들어 있다. 남편은 말만 꺼내도 “그래, 가자”며 금방이라도 갈 것같이 폼만 잡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말만 하는 남편이 얄밉다.
올 봄에 아들 내외와 함께 앙코르와트를 다녀왔다. 10여년 전부터 별렀던 곳이다. TV로 사진으로 볼 때마다 ‘어떻게 저런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을까? 게다가 지금 한쪽에선 허물어져내린다는데 그러기 전에 가야지’라고 생각했다. 정말 가보고 싶었다. 그걸 아는 아이들이 선물로 우리 부부를 데려간 것이다. 그런데 10년 전 그때보다 걸음이 느려졌고 감정이 무디어졌는지 감동도 덜한 것 같았다. 무릎도 살짝 아팠다. 그래도 그 여행은 자체만으로 내게 활력을 가져다줬다. 역사의 깊은 내음을 맡으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누군가 말했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가야지 다리가 떨릴 때 가지 마라.” 10여년 전 가슴 떨릴 때가 아니라 이제 다리가 떨릴 즈음이지만 또 꿈을 꾸어본다.
너무 힘을 쏟아 일에 묻혔던 아내를 한번쯤 바라보고 위로를 건네고 싶지 않은지. 아내의 가슴이 메말라 감동이 없어질까를 염려하며 아름다운 이 가을에 아내한테 여행을 선물하는 남편을 기대하는 것은 과욕일까. 아내의 가슴이 떨려 치유가 일어나며 새로운 삶의 옷으로 갈아입고 그 힘으로 한동안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