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에서 검정 고시 반과 함께 한 시간들이 어언 20년입니다.그동안 저희 반에서 공부했던 형제들이 수 백명 아니 한 천여명은 될 것입니다. 물론 주된 목적이 초등 학교 졸업 자격, 중학교 졸업 자격, 고등 학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를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반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이 마음 먹기 달렸다고 하지만 사람의 능력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출소하면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맹세하고 결심하지만 어느 새 다시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 즉 Born again 한 사람들이 다시 오는 비율이 극히 적은 것을 보면서 거듭남의 중요성을 너무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보람과 기쁨을 가지고 우리 형제들을 매주 찾나 봅니다.
우리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인간의 사랑이란 무조건 생겨 나는 것이 아닌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더워도 형제들이 생각나고 너무 추워도 생각이 납니다.비바람이 쳐도 생각이 나고 오늘처럼 하늘이 너무 새파래도 생각이 납니다.
작은 창 틈으로 저렇게 파란 하늘은 잘 보일까?뒷산의 아름다운 단풍도 볼 수 있을까? 이른 봄 돌 틈에 여리게 돋아나는 풀 포기도 볼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부지런히 형제들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아름답고 복된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추석이면 남 먼저 송편 먹이고 싶고 설이면 가래 떡 먹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정월 대 보름엔 부럼도 깨물었지요. 그래서 어떤 형제는 집에서 보다 오히려 명절을 더 잘 챙긴다고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려면 집 만 하겠습니까? 그냥 내 마음이 형제들을 향해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형제들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저를 섬기고 위하여 기도해 주며 사랑과 정성으로 대해 줄 때 저는 너무 감사할 따름이지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 반에 처음 와 보신 분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얼굴이 깨끗하고 맑으냐고요. 우리들의 마음속에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얼굴을 통해 나타나시기 때문이겠지요.
처음부터는 아닙니다. 계속해서 성경 공부하고 함께 모여 찬양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고 애쓰며 훈련하기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인으로 고백한 이후 그들의 삶은 감사와 감격이 늘 있습니다.
우리 형제들의 신앙이 출소한 후에도 아름답게 성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기를 소원합니다. 온실 신앙이 거친 들판에서도 싱싱하게 뿌리 내려 어떠한 환경에서도 제몫을 담당하는 튼실한 사회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반을 거쳐갔습니다.
김ㅇㅇ은 40세가 넘어서 초등학교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주 어릴 때 부모가 헤어지면서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학교도 못 다니고 혼자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5 번이나 별을 쌓았습니다. 마지막 6번째는 폭력으로 객기를 부려 전치 8주의 외상을 입힌 것 때문에 3년 6개월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게 되어 다시 오게 되었답니다. 글을 모르니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 할 줄도 모르고 답답하니까 손이 먼저 나가는 악순환이 그로 하여금 많은 별을 달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징역에서 그는 죽음 같은 절망을 느꼈습니다. 죽음이 가장 큰 절망이지만끝이 빠르게 오므로 오히려 홀가분할 것 같은데 징역은 절망의 지속성이 있기 때문에 가장 큰 절망이 되는 것입니다.
나이 40이 넘어 홀홀 단신으로 이룬 것도 없는 파란 만장했던 과거의 삶은 패배의 상처로 얼룩져 가슴이 시리고 공허 했습니다.미래가 암담했습니다.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런 그에게 동료들이 예수를 전했고 그는 믿었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학력이라곤 초등학교 1학년 중퇴가 전부인 그는 40년간 문맹으로 답답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저희 반에 와서 한글 공부부터 했습니다. 저도 참으로 오랫 만에 네모 칸이 그려진 공책을 샀습니다. 한방 식구들이 개인 교사가 되어 그를 도왔습니다. 마침내 43살에 초등 학교 졸업 자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도사님! 세상이 환해 졌어요. 새로운 천지가 보여요.”
너무 기뻐하며 저에게 편지를 쓰고 또 썼습니다.글씨도 얼마나 잘 쓰고 사연도 얼마나 잘 쓰는지요. 저도 가끔씩 답장을 보내는데 크리스마스때 카드를 보냈더니 태어나 43년 만에 처음 받는 카드라고 얼마나 감격해 하는지. 그는 지금 출소하여 막노동도 하고 재활용품 수거하는 일도 하면서 제힘으로 방도 마련하여 힘있게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면허시험을 본다고 전화가 왔어요 한 쪽 눈의 시력이 워낙 안 좋아서 1종은 안 된대서 2종 시험 봤는데 합격했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트럭을 한 대 사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파심에서 한 마디 했어요.
“남의 것 절대 갖고 오지 마라. 정직하고 부지런히 하면 하나님께서 돌보실 꺼야.”
“걱정 마세요. 싼 고물 가져오고 비싼 징역 살 일 있어요?”
아주 씩씩하게 말했습니다.그는 예전엔 무익했으나 바울을 통하여 유익한 사람이 되었던 오네시모처럼 사회에 유익한 존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기도를 등지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온갖 짓을 다 하다가 온 ㅇㅇ이란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삐 풀린 망아지 처럼 살았습니다.술을 마시고 싸우다가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해치고 교도소에 들어와서도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독방에 혼자 있으면서 차츰 사람을 죽인 흉악범이란 것을 느끼며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가 그를 죽일 것만 같은 공포와 두려움 좌절 절망을 느끼고 있을 때 아버지가 주고 가신 성경책을 뒤적이다가 거기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초범에다 나이가 어려서 7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검정 고시반에 와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출소 후 신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후원으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결혼도 하고 그리고 교회도 개척했습니다. 시골농촌에서의 개척교회 목회자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저는 가끔 전화해서
“밥은 먹고 있는 거야?”
“그냥 대충 먹어요” 하고 웃습니다.
그러면 저는 슬그머니 우체국 계좌로 쌀 값이라도 보탭니다.
그저 함께 나누어 먹는 심정이지요.
아직 그는 신학 대학원을 마쳐야 합니다. 그래야 목사 안수를 받게 됩니다. 목회와 공부를 병행하고 있는데 많이 힘들겠지요.
그럼에도여우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 둘을 거느린 가장으로씩씩하게 목회하고 있습니다.
말이 아주 어눌한 김 ㅇㅇ도 글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검정고시 반에 와서 한글을 배우고 초등학교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안 그래도 말이 잘 안 되는데 글까지 모르니 옆에서 얼마나 무시하고 우습게 아는 지 아주 주눅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워낙 지지해 주고 세워 주니까 다른 모든 동료들도 그를 잘 도와 주었어요. 그의 방에 나이 많으신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를 아들처럼 도와 주셨지요. 열심히 읽고 쓰고 받아 쓰기를 해서 점점 글을 알게 되었습니다.그에게도 성경을 읽게 했는데 그가 읽을 때에 듣는 모두가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래도 아무도 내색 않고 그가 다 읽을 때 까지 참아 주고 기다려 주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또 인내를 연습하게 되었고, 연약한 사람을 돕는 것이 이런 거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사실 매일 매일의 생활이 훈련이고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급하고 이기적이고 참아주지 못하는 게 사람이고 그들인데 이렇게 서로 기다리며 격려하는 그들을 보면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출소 해서 취업을 했습니다.
저에게 자주 전화를 합니다. 이 말은 꼭 합니다.
“전도사님! 몸은 아픈데 없으세요? 제가 기도 많이 해 드릴께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교회에 시무 할 때인데 교회에서 3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어요. 무언가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볼일을 보고 깜박 잊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어요.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이 난 겁니다. 지금처럼 핸드폰도 흔치 않던 때라 (나는 지금도 없지만 그는 지금은 있습니다. )연락 할 수도 없어 부랴 부랴 차를 타고 교회로 갔어요. 이미 땅거미는 지고 있는데 그는 교회 마당의 벤치에서 나를 주려고 포도를 사서 가슴에 안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얼마나 미안하고 고맙던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그는 막 실직을 했다고 했습니다. 나를 만나 위로를 받고 싶었을 꺼예요. 그런데 오지 않는 나를 4시간 넘어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얼마나 외롭고 쓸쓸 했을까요? 저녁을 먹이고 티 셔츠를 하나 사서 입히고 싫다는 걸 억지로 차비까지 쥐어서 집으로 보냈습니다.물론 이제는 다시 취직을 해서 잘 살고 있지요.
“전도사님! 장가 좀 보내 주세요.”
어디 마땅한 신부감 없을까요?
사실 저는 그들을 위해서 뭐 해 준 게 하나도 없어요. 다만 그들과 함께 같이 있어 준 것 뿐 입니다. 그것도 겨우 일 주일에 두어 시간 남짓 뿐 입니다. 그러고도 제가 받은 것은 몇 곱절이나 되니 이렇게 많이 남는 일이 이것 말고 어디 있을까요? 갚아도 못 다할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그저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처음 시작했을 땐 좀 나이가 들어 보이려고 하기도 했지만 지금을 아무리 젊은 척하려 해도 젊게 봐 주지 않는 게 좀 달라졌을까, 별로 달라 진 것도 없는 데 세월이 이렇게 흘렀군요.
우리 반을 거쳐간 수많은 형제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며 이 땅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 갈 것을 기도합니다.
– 김영숙 가정문화원원장(yskim1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