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생활 15년 동안 나는 전업 주부였다. 결혼 할 때 시부모님이 안계셨다. 홀어머니의 맏딸로 자란 나는 첫아이를 낳자마자 어머니가 돌아 가셔서 아이 키우며 기댈 데 라곤 전혀 없었다. 세아이를 부등켜 안고 울기도 많이 했고 너무 힘들땐 한 아이 만이라도 누가 한번만이라도 데려다가 봐 주었으면 했다.
공부같은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도 내 마음 속엔 언젠가 공부하리라 했다. 희미하고 막연했다. 신학을 공부해 보고 싶었다. 열심히 순모임 할 땐 더욱 그랬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게 되니 잔손이 덜 가게 되었다. 드디어 신학교에 입학했다. 학생이 되었으니 눈치 보지 않고 공부했다. 밤을 세워도 행복했다. 엄청 스트레스를 받을 땐 왜 사서 고생하나 하며 울기도 많이 했지만 재미도 있었다. 졸업하고 교회서 사역했다. 너무 재미 있었다. 일이 많을 수록 더 힘이 났다.
가정 사역을 하며 그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공부에 대한 마음이 끝이 없었다.
사역을 더 확장하고 싶었다. 하나라도 더 연구해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공부해서 남 주고 싶었다. 평생 교육원도 연장교육원도 열심히 다녔다.
그리고 Fuller 신학교의 목회학 박사과정에 도전 하게 되었다.내 나이 쉰 다섯도 넘어서.
한과목당 3,000페이지의 독서 보고서를 쓸 때는 너무 벅차서 허덕거리기도 수없이 했지만교수님들께 배우는 기쁨으로 감사가 넘쳤다.
환갑전에는 꼭 끝내야지 다짐하며 채찍질했건만 역부족이어서 환갑이 지나 하나님의 은혜로 졸업을 하게 되엇다. 공부는 한국 말로 했는 데 졸업식에 가서 보니 외국사람들이 많아서 진짜로 미국 학교가 맞기는 하구나 생각했다. 누가 하랜다고 했으면 벌써 그만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걸 하니 힘 들어도 결국 해내게 되었다.
그 힘든 걸 왜 하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남주려고요”
그래서 중년학도 공부하고 노년학도 연구한다. 남 준다고 생각하면 더 정성스럽게 공부하게 된다.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들은 그 길로 열심히 달려 가면 된다. 기도하고 길을 찾으면 기회는 오게 마련이다.
지금은 가정 문화원을 열어 가정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부부관계 회복을 돕고 있다. 상담도하고 강의도 한다. 부부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경계 선상의 부부”를 돕는다. 가정이 회복 되는 것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이다.
*경계선상의 부부 : 갈등의 심화로 지칫하면 깨어 질 수도 있지만 잘 해결하면 회복되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의미로 필자가 쓰는 용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