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어려웠던 시절. 엄마는 우리에게 고기를 먹이는 일이 참 어려웠다. 명절에 한번 그것도 실컷이 아닌 정말 맛만 보는 수준이었다.
때로 푸줏간에 가서 쇠기름을 얻어 오셔서 멀건 된장찌개에 조그맣게 썰어 넣고 끓여주셨다. 우리 4남매는 그것도 서로 건져 먹으려고 숟가락을 집어넣고 경쟁을 벌였다. 요즈음엔 아무도 그런 쇠기름을 먹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기름은 한겨울 얼어터져 새빨갛게 튼 손등에 뜨겁게 달구어 문지르던 약이기도 했다. 너무 뜨거워 펄펄 뛰었지만 엄마가 꽉 잡고 문지르면 신기하게 낫는 것 같았다. ( 바셀린도 없던 시절이어서 튼 손에 쇠기름을 녹여 바르면 기름이 녹으며 상처에 스며들어 부드럽게 나았다.) 너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6.25)때 행방 불명되셨고 우리 엄마는 31살에 혼자 되셨다.
31살 과부에게 4 남매는 너무나 벅찬 인생이었을 것이다.
나는 7살 짜리 맏딸 그리고 5살 3살 남동생에 돌도 안 된 막내 여동생까지. 그 가녀린 어깨에 매달렸으니 얼마나 신산했을까? 옛날엔 아내들의 바깥 출입이 잦지 않았었다.
바깥세상을 잘 모르던 엄마였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젊은 아내는 당장 생활 전선으로 내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자식들의 제비 같은 입에 뭐라도 넣어 줘야 했다. 맨몸으로 부딪히는 세상이 너무 힘겨웠을 터이다. 남의 가게 추녀 밑에 좌판을 놓고 잡화를 파는 엄마에게 종종 들리곤 했다. 그리고 함께 전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던 추억도 있다.
우리에게 “공부는 꼭 해야 한다. 걱정마라. 엄마가 어떻게든 공부는 시킬 테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셨을까? 자식을 공부시키겠다는 마음이. 지금도 잊지 못한다.
추운 겨울이면 연탄 때는 부뚜막에 4남매 운동화를 가지런히 올려놓고 데워 주시던 사랑, 교복 입고 나서는 우리들에게 여자는 깔끔해야 된다며 솔로 어깨를 털어주시던 모습. 이런 어머니였기에 아버지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자란 우리 남매들이다.
힘든 일이야 왜 없었을까? 그래도 우리에게 늘 “너희들이 내 힘이다. 그리고 기쁨이다” 하셨다.
다 큰 다음에 엄마에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엄마 우리들 키우면서 제일 힘든 게 뭐 였어요?” “의논할 사람이 없었던 게 제일 힘든 일이었어. 다른 건 별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셨다.
그런 엄마가 51살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아버지를 평생 마음에 품고 사셨을까?
아침에 된장찌개를 끓이다가 문득 엄마생각이 났다.
된장 찌개에 쇠고기 뿐 아니라 온갖 것을 다 넣고 끓이는데도 지금은 왜 그 맛이 안 날까? 아마 엄마의 음식이 추억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