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동네에 망나니가 살고 있었다.
망나니가 생각해 보니 이제 아버님 연세도 있고 하니 마음잡고 효자가 되어야 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이웃에는 소문난 효자가 살고 있었다. 그래서 효도에 대해 한수 배우기로 하고 효자를 찾아가서 그 비결을 물었다. “어떻게 하면 효자가 되느냐?”
“아버지 잠자리에 드시기 전에 먼저 이불 속에 누워 자리를 따뜻하게 덥혀 드리거든 ”
“아버지가 출타 하실 때면 신을 가슴에 품어 데워서 내어드리는 거야.”
“거 별로 어렵지 않군. 당장이라도 해야겠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아버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자리를 깔고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마침 아버지가 들어와 이 광경을 보고 “아니 이놈이 이젠 아비 이부자리까지 넘봐?”하며 지팡이로 아들을 후려 쳤다. 아들이 “효자? 효자 좋아하네.” 하며 달아났다는 얘기다.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 무릎에 앉아 듣던 얘기다. 늘 말씀하셨다. “부모가 온 효자해야 자식이 반효자 한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내리 사랑이지 치사랑이 된다더냐?”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상당히 인상적이었나 보다.
부모의 양육태도 여하에 따라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된다.
어머니 학교에서 강의 할 때 내가 늘 물어보는 말이 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존경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독자들도 대답해 보십시오.) 대부분 대답이 없다. 그럴 확신이 없는 거다. 또 묻는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어머니를 존경하시나요?”
모두 “네.” 합창하듯 대답한다.
왜 존경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 할까? 아마 아직 자식이 어리고 어머니는 아이에게 압박을 느낄 만큼 심리적 부담을 주며 닥달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자녀를 믿어주지도 않고 일관성 없이 대하는 것도 상처를 준다.
좋은 소리도 귀에 안 들어오는데 하물며 잔소리는 말 할 것도 없다.
비난하고 끊임없이 비교 당하는 아이들은 자존감도 떨어지고 의욕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부모가 죽은 후에야 그 말을 듣고 비올 때 마다 울어대는 청개구리 마냥 말 안 듣고 불효하는 것 같은 아이들이지만 어느새 점점 자라가며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녀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며 늘 사랑으로 대하며 존중할 때 아이들은 부모님을 의지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자녀를 사랑으로 용납하면 안정감을 느끼고 부모에게 강한 귀속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를 존경하듯이 그들도 우리를 존경하리라 믿는다.
우리는 다 자녀를 사랑한다. 그런데 내 생각대로 내 방법으로 한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닌 내 생각에 아이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해 준다.
대화가 좋다니까 대화도 한다. 2시간이나 넘게 대화했는데도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 답답해. 엄마 아빠는 꽉 막혔어.”
언젠가 고 3 아이들의 기도 제목을 받아 본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엄마에게 짜증 부린 것 미안해하고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하는 엄마의 은혜를 고마워하는 내용들이 참 많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아이들이 훨씬 성숙하고 마음이 따뜻하고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이런 생각들을 보니 부모들은 안심해도 되겠네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망나니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아이고 ,웬일이냐, 내 아들. 정말 철이 든 모양이네. 고맙다.”
효자는 부모하기 나름이다.
(아름다운 사람들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