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형제  중 큰 아버님께서 자녀가 없으셨는데 동생인 우리 아버지 결혼하시고 아버지 이후 25년만에  내가 태어났으니 25년 만에 아기 울음이 났습니다.  온 집안에 경사였지 않겠어요.
그러나 2년 후 내 남동생이 태어나자 나는 데켠(평양 말?)으로 밀리고 말았지요.
연년생으로 남동생이 태어나고 또 여동생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한국전쟁이 일어났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엄마는 네 아이를 건사하기 힘들어 세아이와 친정으로 피란 가고 나는 엄마와 떨어져 큰어머니와 피난을 가게 되었어요.
하루 아침에 엄마를 잃었으니 어린마음에 동생들만 데리고 가고 나혼자 남겨졌을 때 아이가 어땠을까요?
좀 크다고 해봤자 7살 맏딸 분리 불안이 생겼어요.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 엄마가 시골로 데리러 왔을 땐 참 서먹해서 멀뚱멀뚱 쳐다 보기만 했지요.
그리고 매사에 자신감이 없었어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실제로 할수 있는데도 내성적인 아이로 변해 갔어요.
사실 이렇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은 후일 제가 공부한 때문이지요.
그리고 맏딸이어서 동생들 밥 챙기고 살림 맡고, 일 나간 엄마 전찻길에서 기다리고, 그래도 동생들이 있어 의지가 되었지요 동생 업으면 등이 따뜻하고 의지가 되고 든든했거든요.
그러나 이런 것 통해 홀로서거나 리더십 같은 것도 생기게 되더라구요.

2) 부모님의 남다른 기대란, ‘훌륭하게 되어 집안 일으키라’ 따위가 아닌 ‘네 동생들 줄줄이 있으니 돌보아 주거라’ 라는 기대였어요.
그래도 동생업고 고무줄하고 땅바닥에 내려놓고 숨바꼭질하고 그때는 골목이 참 넓었는데 어른 돼서 가보니 왜 그리 좁은지.

3) 공부하란 소리 안 들어 봤어요.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동생이나 봐라 라는 소리 듣기 십상이니까요.

9) 공부를 더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교수도 되고 싶고, 연구도 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언감생심 밑의 동생이 셋이나 있는데 입 벙긋도 못했지요. 그냥 취직해서 어머니를 도와 짐을 함께 지게 되었어요.
결혼하고 전업주부 15년 동안 마음속에 공부에 대한 욕심이 계속 숨어 있었나 봐요.
40이 넘어서 대학원 했지요.  결국 환갑 지나 부부관계 회복에 관한 논문을 쓰고 학위 받기까지 결국은 꿈은 포기하지 않으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남편은 지금도 자기가 장학금 주었다고 자랑하구요.

10) 그리고 결혼하구요. 늘 친정걱정이 많았지요. 등록금도 보태고 동생들 집 살때도 보태고, 그래도 동생들은 고맙단 말 안하지요.
더 많이 안주나 생각하더라구요. 사실 어머니는 맏딸인 내가 의지도 되고 의논상대가 되어서 든든하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혼자 사는 사람의 애로점을 인생의 고비마다 의논할 마땅한 대상이 없다는 것이잖아요?

11) 책임감과 성실성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보수성도 강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