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여! 이 땅에 통일을 주소서. 삼팔선이 여리고 성처럼 무너지게 하소서.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던 평양성이 다시 복음으로 회복되게 하소서.”

정말 열심히 기도했었다. 기도 때마다 제일 먼저 애절하게 기도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지 이 기도가 슬그머니 옅어지더니 별로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이번에  젖염소 목장 준공식 참석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다.
황해 북도 봉산군 온정리 염소목장에 뉴질랜드산 젖염소를 보내고 거기서 염소의 젖을 짜는 착유장과 유가공 공장을 지어준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영양을 고려하여 질 좋은 젖을 먹이기 위함이다.
우리는 중국을 통해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공항에 도착했다.
한 나절 만에 기도 속에만 있던, 마음 속에만 있던, 혹은 호기심속에만 있던, 말로만 듣던, 평양에 도착했다.
여러 대의 버스가 우리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대의 로고가 선명한 버스를 보니 반갑기도 하고 그동안의 교류가 진전이 있었구나를 느끼게 됐다. 늘 보던(?) 평양의 거리를 지나 양각도 호텔에 들었다. 대동강변에 자리 한 46층짜리 호텔이었다. 몇 번 와보셨던 대표단은 양각도 호텔이 고려 호텔이나 보통강 호텔 보다 더 깨끗하고 낫다고 했다.
도착 첫날 연회장에서 북측이 주최한 만찬이 있었다. 평양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다음 날 아침 대동강변을 조깅했다.   몇 해 전 평양을 방문했던 기자가 아침에 열심히 조깅하는 걸 본 북측 안내원이 그랬단다. “와 아침부터 헛바쿠를 돕네까? 배꺼지게 시리.”
그 말은 어려웠던 시절 우리네 어머니들에게 듣던 말이다. 애들이 천지 사방으로 뛰는걸 보신 어머니는 “애들아, 고만 좀 뛰거라.  배 꺼진다.”
북측도 이런 말이 사라질 날이 오리라.
우리는 황해북도 봉산군 온정리 로 향했다. 6시 반에 이른 아침을 먹고 25인승 현대버스에 나누어 타고 우리가 온 목적지로 내려갔다.
마침 한창 모내기철이었다. 남한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데 비해 철이 조금 늦었다 .전인민의 모내기 독려로 가정주부들까지 다 동원 된다고 했다.  모내기는 9시에 시작해서 6시에 끝난다고 했다. 남한은 새벽 일찍 나와서 해거름해야 집으로 돌아간다. 남한이 일하는 시간도 길고 일의 강도도 훨씬 강하다. 온정목장에는 약 900두의 염소를 보냈는데 새끼 쳐서 현재 1400 여 마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젖염소는 뉴질랜드 현지에서는 많으면 한마리에서 최대 8 Kg까지 짜는데 비해 여기서는 1.5 Kg 정도 짠다고 했다. 새끼 낳고도 충분한 사료가 공급되지 않으니까 어미도 젖을 못 내는 것이다. 앙상한 엉덩이가 눈에 밟힌다.
생산되는 요구르트와 치즈는 아직 양산체재는 아니지만 앞으로 어린이들에게 질 좋은 영양을 공급하리라고 본다.
평양으로 돌아와 다시 대동강가로 나갔다.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을까하고. 배간사님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다가 큰소리고 주여! 외치고 싶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다행히 가까이엔 아무도 없었다. 둘이서 손을 번쩍 쳐들고 목청껏 기도했다.
주여! 평양성을 복음으로 회복시켜 주소서. 1907년 성령의 역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북한의 내 동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짧은 기도였지만 진실로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통일 만이 살길인 북한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 목이 메이고 아직 통일은 이르지 않을까 생각하는 남측은 멀뚱히 그들을 바라 볼 뿐이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우리는 하나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곳 평양에선 서울에서 보다 더 실감이 나질 않았고 한 핏줄이라고 하기엔 너무 먼 당신처럼 느껴졌음은 나만의 생각일까?
고려항공을 타고 북경 공항에 도착하니 서울 보다 더 화려한 면세점이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상해를 돌아보며 천지가 개벽한 것 같다고 한지가 한참 지났건만 평양은 언제 천지가 개벽하려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는 구호가 언제쯤 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로 바뀔려나.
주님 ! 주님의 날이 속히 오게 하소서.

“때가 차매(갈 4:4)”

그 때가 속히 오게 하소서. 하나님의 은총이 북녘 땅에 함께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