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만 결혼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랑하려는 사람도 결혼을 한다. 서른 해를 마감하는 11월의 마지막 날 친구 소개로 소위 소개팅을 했다.
나는 아내와 만난 지 일주일 만에 결혼을 하기로 작정하고 3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31살 노총각(?)의 결혼이었다. 사실은 대학 때 C.C.C.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먼발치에서 서로 알고는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자기가 원하는 타입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당시 킹카로 자부하고 있었는데 착시치고는 한참 잘못 되었던 것이다. 내 아내는 인생의 가장 큰 과오를 범하는 실수를 할 뻔했다. 나를 놓쳤더라면… ㅎㅎ.
대학 졸업 후 사실은 한번 데이트한 적이 있었다. 또 한번의 만남을 신청했더니 보기 좋게 딱지다. 세월이 흘렀다. 그때만 해도 결혼연령이 빨랐기에 아내는 20대 후반으로 넘어가는 위기에 서 있었다. 콧대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도끼로 찍을 필요도 없이 거저 굴러들어왔다.
다시 만났을 때는 신앙이 같다는 공감과 결혼에 대해 열린 마음이 있었기에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아내는 이 해가 가기 전 예수 믿는 좋은 배우자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부부는 살을 맞대고 살아가면서도 생각과 감정을 달리한다. 사랑과 미움 그리고 서로 다른 정서와 감정을 나누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다른 것 때문에 부딪치고 엉키기도 했다. 아내는 서울 사람, 나는 깡촌 출신, 문화가 다르고 정서가 달랐다. 식성도 다르고 잠자는 것도 다르다. 나는 종달새형 인데 아내는 올빼미형이다. 사사건건 부딪쳤다. 서로 다름 속에서 공존의 조화를 이루었다.
사랑하면서 때로는 갈등도하고 무심하기도한 부부의 삶……. 사랑한다고 갈등이 없는 것도 아니고 갈등한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결혼생활을 통해 인격적으로 더 성숙할 수 있었고 절대자 앞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결혼생활은 내 인생의 최대의 훌륭한 학교였다.
젊어서 나는 집안에서 제법 큰소리치며 살았다. 가부장적 문화의 유전자가 나에게 배어 있다. 결혼 전 아는 것이라고는 ‘신혼 초 잡아야지’ 뿐이었다.
잘 나갔고 전권도 휘두르며 살았다. 허나 지금은 완전히 역전인생이 되었다. 나는 아내 눈치를 보며 살아야하는 흰머리소년이다. 아내가 식사를 만들면 뒷처리는 으레 나의 몫이다.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다. 그런데도 내가 설거지를 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생존전략이다.
둘째는 노후대책을 위해서이다.
결혼 3년차 시절 근무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석유 파동으로 몇 년 동안 힘들었다. 절박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아내의 내조는 기도였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기도로 힘을 주었다. 어려움 속에서 근검절약으로 가정을 경영한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아내는 약사이지만 결혼 전에 제약회사에 근무했을 뿐 약국을 해 본 일이 없다. 사업과 생활전선에는 항상 나를 몰아세웠다. 아내 앞에서 평생 나는 돈 벌어 와야 하는 돌쇠, 아내는 공주다. 거기에 아내는 40이 넘어 신학을 공부하고 50이 훌쩍 넘어 박사학위를 시작했다.
물론 남편의 장학금으로 Fuller 신학교에서 “부부 생활/가정 사역” 부분으로 목회학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그 나이에 왜 공부를 하느냐고 물으면 남한테 주려고 공부를 한다고 한다.
때로 힘들어 중단하려고 할 때는 박사는 가문의 영광이라며 독려했다. 환갑을 넘기고서 학위를 취득했다. 강의도 하고 글도 쓴다. 또 아내는 교도소 봉사를 24년째하고 있다.
매주 목요일이면 변함없이 교도소에 간다. 삶을 치유해 주며 공부를 가르친다.
아직도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여자……. 그는 최장기수이다. 교도소 사역을 통해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하며 “가정문화원”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국을 누비며 “행복한 가정이 경쟁력”이라는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나는 사업을 하면서 틈틈이 아내를 따라 다녀야만 한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강의하는 독특한 모델이기 때문이다. 지난 16년 동안 1600여회 이상의 강의와 세미나를 했다. 아니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젖은 낙엽처럼 빌붙어 다니며 계속 망가지기 일쑤였다. 사는 모습 그대로 강의를 해야 하니 젊었을 때 쌓아놓은 내공이 없어 계속 깨지고 망가지는 것은 항상 내 쪽이다.
강의와 상담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가정이 회복되는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며 보람을 느낀다.
가는 곳마다 출신학교인 고려대와 이화여대가 소개된다. 두 대학의 이름 없는 홍보인-무급의 명예홍보대사이기도 하다.
딸도 제 엄마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이화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CPA와 CFA의 자격증을 획득한 후 World Bank 미국 본사에 근무하고 있다.
젊어서는 고운 정, 예쁜 정, 미운 정이더니 나이가 드니 연민의 정에  측은한 마음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싸워도 이제는 이길 생각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지…….”  철든 생각을 한다. 지겹도록 붙어 다녀야하는 부부. 숨 가쁘게 살아온 힘든 고비마다 늘 곁에 있어 손잡고 격려하며 살아온 아내…….
때로는 볼멘소리에 바가지를 긁어도 그 소리 들을 때가 행복한 줄 알라는 아내의 잔 말(씀)을 이제는 즐겁게 들어야만 한다.
“우리는 맞는 게 없어”
“우리 마주치면 웃자”
서로 바라보며 오늘도 활짝 웃어본다. 주홍색 배꽃 배지를 달고 다녔던 아내를 만난 것은 나에게 더없는 행운이었다. 그리고 축복이다.
나는 이화의 영원한 사위…….
젊어서는 일을 챙겼지만 이제는 마누라를 챙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