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은 줄이고, 칭찬과 격려는 크게
가정을 다시 시작한다면 /
나는 자녀들을 더 많이 격려하는 사람이 되겠다.
나는 5남매의 막내로 자랐다. 사랑을 받으며 구김살 없이 자랐다.
그러나 나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못했다.
한결같이 꼴찌에서 5등을 벗어나지 못했다. 수우미양가에서 ‘양가’를 좋아하는 별종이었다.
하지만 중학교 입학시험에는 기적적으로 합격을 했다.
영어 알파벳을 형이 가르쳐주어 미리 익혔다. 영어 시간에 몇 사람을 지정하여 알파벳을 쓰게 했는데 칠판에 쓰고 나니 영어 선생님이 손짓을 했다.
나는 겁이 나서 뒤로 물러섰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오라하면 매 맞기 일쑤고, 손들고 서 있거나 벌 받는 일뿐 이였다.
뒤로 물러나는 나를 향해 선생님은 계속 오라고 말씀하셨다.
머뭇거리며 다가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생님이 칭찬을 했다.
“잘했다.”
나는 그때 전율을 느꼈다. 난생 처음으로 선생님으로부터 들어보는 칭찬이었다. 신명이 나서 나는 그때부터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1학년 1학기말 성적이 반에서 23등, 영어는 1등이었다.
1학년말에는 전체 3등을 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리고 2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면제받고 학교를 다녔다.
내가 살던 고향은 시골벽촌 바다를 막은 간척지이다. 오지 시골 고등학교 그곳에서 서울 명문의 대학에 입학한다면 그것은 기적이다. 지금은 이름마저 없어진 그 고등학교에서 나는 고려대 경제과를 졸업했다.
무엇이 나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는가?
“잘했다.” 이 한마디 칭찬의 말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말은 생명력이 있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사람을 좌절시키는 비수가 된다.
그러나 삶의 불을 지피게 하는 엄청난 촉매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평판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놀라운 잠재력이 있다.
부모를 살해한 청소년의 검찰 최후 진술이 있다.
“나는 10살 이후 한번도 부모로부터 칭찬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듣는 것은 지적이고 간섭이고 비난뿐 이었습니다.“
칭찬의 부재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
지적이나 책망으로 사람을 바꿀 수 없다.
칭찬하면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간다.
자녀를 향한 격려의 입술이 축복의 통로다.
부모들의 공통적 실수는 자기 아이를 칭찬하지 않는 것이다.
잠재력 개발에 가정만큼 자녀의 소질을 촉발시키는 곳은 없다.
당신의 자녀들의 미래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우리가 자녀들을 칭찬하는 것은 현재의 대상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의 대상을 칭찬하는 것이다.
지적은 줄여라. 그리고 칭찬과 격려는 크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