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아들 배후의 부모이기를 포기하라
[[제1415호] 2014년 6월 7일]
가정에서도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현대의 서구문화가 충돌한다. 그것을 우리는 세대차이라고도 하고 문화격차라고도 한다.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내 아내도 “공자가 죽어야 가정이 산다”라고 한다.
삼강오륜의 ‘부자유친’과 ‘부부유별’ 이것은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문화유산이다. 이것이 가정을 힘들게 한다. 현대의 패러다임은 부자유친이 아니라 부자유별이다. 부부간의 친밀한 관계가 아들과 아버지의 친밀한 관계보다도 더 중요하다.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 하고, 자녀로부터 부모는 떠나야 한다. 떠나지 못함으로 고부갈등이 생기고 자녀들을 힘들게 만든다.
우리나라의 ‘한’이라는 용어는 여인들의 응어리진 가슴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의무만 있었지 권리는 없었다. 이 땅의 여성들은 오랫동안 무시당하고 사람대접 받지 못했던 ‘한’ 맺힌 삶을 살아왔다. 한 세대가 아닌 5,000 년 동안 부당하게 대접받고 소외당한 서러움이다.
“고초당초 맵다한들 시집살이 보다 더 할 소냐.” 얼마나 시집살이가 혹독했으면 그랬을까. 오늘날에는 그런 시집살이를 시키는 부모는 드물다. 또 힘 있는 부모들은 결혼한 자녀와 동거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고부갈등은 상존한다.
모성이 강할수록 자녀의 행복을 깨기도 한다.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며느리를 시기하는가 하면, 아내를 사랑하는 아들을 미워하는 시어머니도 있다. ‘시어머니 부를 노래, 며느리가 먼저 부른다’라는 말이 있다. 며느리가 미운 것이다.
“못생긴 며느리 제삿날 병난다”라는 말도 있다. 눈 밖에 난 며느리가 미운 것이다. 미운 짓 할 수도 있다. 며느리를 몸종쯤으로 생각하는 가정도 있다. 그러하니 시댁에 갈 때면 늘 머리가 아프다.
시댁이 밉고 싫어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아내, ‘시’자만 봐도 혈압이 오른다시댁에 가기 싫다. 소외 당하고 자기 입장에서 편들어 주는 사람도 없다. 부부는 편들어 주는 것인데 남편도 내 편이 아니다. 모처럼 가족끼리 모여도 형수나 제수 소리 제대로 한번 못 듣고 내 편이 없는 것 같아 늘 서운하다. 사랑은 편들어 주는 것인데 그것이 없으니 서럽다. 모처럼 나선 길, 시댁에 가면서 싸우고, 오면서 또 싸운다. 결혼한 아들은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다른 여자의 남편일 뿐이다.
고부갈등은 결혼한 아들을 내 아들로 생각하는 세대의 갈등이자 문화의 갈등이기도 하다. 자녀가 결혼한 후에 홀로서기를 시키지 않고 밤늦게까지 데리고 있는 경우도 있다. 시집 보낸 딸을 지나치게 감싸고 조정하려는 부모도 있다. 자녀의 행복을 깨는 리모컨 부모들이다.
아들 배후의 부모이기를 포기하라. 자녀가 결혼하면 독립된 가정이다. 독립될 때 질서가 생기고 가족 관계도 좋아진다. 조정이나 간섭이 아니라 후원과 지지자가 되는 것이다.
효자, 효부는 좋은 부모가 만들고 좋은 시부모는 좋은 며느리가 만든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잃으면 아들도 잃는다. 내 아들로 두고 싶으면 며느리 마음을 잡아라. “그 아이가 우리 집 복덩어리야” 하고 다녀 보아라. 그 말이 며느리의 가슴에 다가간다. 그런 가정에 고부갈등이 있을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