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자식의 불효를 탓하기 전에
[[제1598호] 2018년 6월 9일]
며칠 전 친구와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옆 자리에 초로의 점잖아 보이는 부인이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왜 혼자 식사를 하세요?”
“점심은 늘 이렇게 식당에서 먹지요. 며느리한테 부담 주기 싫어서 그래요. 아침 먹고 일찍 출근하는 사람처럼 나와서 점심은 식당에서 사먹고 노인정이나 시장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저녁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가지요. 뭐라고 안 해도 며느리 눈치 보여서 편하게 해 주려고 이렇게 나와 다녀요. 다행히 남편이 남겨 놓은 유산이 있어서 아쉽지 않게 용돈을 쓸 수 있어요. 그저 감사할 뿐이예요” 하며 묻지 않은 말까지도 한다. 쓸쓸함이 묻어났다.
남편 그늘(?)에서 곱게 늙은 이 노모를 얼마 후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분은 눈물을 흘리며 “아들이 나더러 나가 살래요. 도무지 불편해서 살 수가 없대요. 내가 그렇게 숨죽이고 살았는데도요.”
온갖 희생 마다하고 키워서 자식을 위해 살 터전까지 마련해 주고 행여 불편할세라 조심조심 살았는데 불편하니 나가 살라고.
자기 자식 키우면 부모 은공 안다고 했는데, 제 자식에게 하는 것의 백분의 일만 해도 효자 소리 들을 수 있을 텐데….
얼마 전 신문에는 동거 남자를 살해한 혐의로 중년의 딸이 구속되자 “사실은 내가 사위를 죽였다”며 칠순 노모가 구속을 자청하고 나선 사건을 보도했다. 물론 재판부가 정확히 판단해서 결정을 내릴 일이다.
노모는 아직 앞날이 창창한 딸이 전과자로서 고통 받는 것이 안타까워 차라리 자신이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지내겠다는 것이다. 자신을 주고 주고 다 주어도 모자라고 목숨이 열 개라도 자식을 위해 다 주고 싶은 것이 어미의 심정이다.
부모는 그런데 자식은 왜 안 그럴까? 물론 모든 자식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옛날 한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자기의 아버지(아이에게는 할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산에다 내버리고 돌아오려는데 아이가 그 지게를 도로 지고 내려오더란다.
아버지가 “이놈아 그 지게는 뭐 하러 도로 지고 내려가?”
“이다음에 이 지게에 아버지를 지고 오려고요.”
우리는 말로 자식을 가르치지 못 한다. 우리가 행하는 대로 자식이 배우게 마련이다. 자식은 부모의 말을 듣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그림자를 보고 자란다고 한다. 자식의 불효를 탓하기 전에 지금 나는 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을 내 자식에게 보이고 있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김영숙 권사
• 가정문화원 원장
• 두상달 장로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