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일터와는 구분되어야 하는 가정

 

대통령 자녀가 집에서 아버지를 부를 때 대통령이라 부를까? 아빠라고 부를까? 그 아내는 남편을 대통령이라 부를까? 아니면 여보라고 부를까? 어떤 호칭이 자연스럽고 정겨울까? 친구나 친지를 부를 때도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을 구분해야한다. 가정은 공적인 공간이 아니다. 가정 안에서 가족 간 호칭은 사회적 지위와 제도나 기능으로 주어진 이름이 아니다. 가족관계 호칭으로 불러야 가족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1700년대 유명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있다. 그의 철학은 “자연 상태”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불행하게 사는 것은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위적 교육이 아니라 자연적 교육을 강조했고 기계화되고 상품화 되는 현대문명을 비판했다.

인간이 만든 제도나 문화의 구도 속에 스스로 갇혀 사는 것이 불행의 단초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모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가정은 사회로부터 피난처이고 안식처이다. 가정은 사회적 기능이나 역할의 연장이 아니다. 배가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아들이 있다. “아빠 배가 아파요.” 국어교사인 아빠가 이 말을 듣고 다가가더니, “얘야, 발음을 정확히 해라. ‘배’가 아프냐? ‘베’가 아프냐?” 하고 지적하며 시간을 끌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런 가정의 정서적 유대감은 어떨까?

수사관 아빠가 귀가하자마자 사춘기 자녀한테 추궁한다. ‘너 4시에는 어디에서 뭘 했고 5시에는 누구하고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며 피의자 심문하는 식으로 다가간다면 그 곳은 가정이 아니다. 취조실이나 수사관실의 연장일 뿐이다.

유치원선생님이 남편을 어린이로 대하고 훈련 장교가 자녀들을 일렬종대로 세워 인사하게 한다면…. 가정은 업무연장 일터가 아니다. 사랑의 실천장이다.

부모자식 간이나 부부는 바깥에서의 지위고하를 떠나 자연인으로 만나야 한다.

업무가 아닌 사랑과 정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래야 대화와 소통이 되고 정으로 버무려지는 끈끈한 가정이 되는 것이다. 안식처요 충전소인 가정에서는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부는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관계다. 에덴동산은 최초 아담과 이브가 벌거벗고 살아도 부끄럼 없는 자연동산이었다.

자연적인 암수의 사랑은 유치한 것이다. 유치하게 만나고 유치하게 사랑하고 유치하게 삐지고 유치하게 싸운다. 유치하게 싸우니까 쉽게 풀리고 하나가 된다. 부부가 이념적 차이나 세계평화와 인류복지를 위해 싸운다면 한시도 같이 살 수가 없다. 부부는 둘만의 비밀스러운 로맨스가 있다. 연인 코스프레도, 닭살 돋는 멘트도 좋다. 허깅이나 스킨십이나 사랑표현은 더더욱 좋다.

부부가 손을 잡고 가다 아는 사람이 오면 슬그머니 손을 놓아버린다. 못 잡을 사이가 아닌데도 남의 눈치를 본다. 나이 들어 정답게 손잡고 걸어가는 모습은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이다. 오늘도 손잡고 자연스럽게 걸어보자. 그리고 사랑도 표시해보자. 가정은 논리나 시스템으로 아니라 감성으로 작동된다. 가정은 정과 감성으로 만나는 사랑의 작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