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조선 07. 버리고 싶은 물건은 남편과 가구!

캘리포니아에 사는 한 주부가 색다른 이색광고를 낸 일이 있다.
“남편을 염가로 양도합니다. 사냥도구와 골프채 그리고 사냥개 한 마리를 덤으로 드립니다.” 였다. 광고가 나간 후 이 주부는 60여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중엔 남편은 필요 없고 사냥도구와 사냥개만 양도할 수 없느냐고 문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이미 이혼한 주부들은 이혼 후 겪은 어려움과 후유증을 말하며 말리기도 했다. 이혼 후 자녀양육과 교육이 힘겨웠다, 외롭다 등등…을 말하며 왠만하면 참고 살라는 충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혼을 하면 또 다른 행복의 세계가 펼쳐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헤어지고 보니 행복의 궤도가 아닌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한 사람들의 70~80%는 후회를 하는 것이다.

좋아하던 것도 싫증나면 바꾸고 싶은 것이 변덕스러운 사람의 마음이다. 주부들에게 바꾸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남편과 가구’라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꼭 있어야만 하는 필수품인데도 소유가 되어버리고 나면 시들해지는 것이 인간의 감정이다.

남편과 가구에는 공통점이라는 것이 몇 가지 있는 것 같다.
두 가지가 모두 말이 없다. 정감 있는 언어나 감정의 소통이 안 된다. 세월과 더불어 낡아진다. 쓸모나 값어치도 떨어진다. 오래될수록 칙칙해지고 매력도 없다. 꼼짝도 안하려고 한다. 때때로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버리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같이 있어도 좋지를 않다. 그 앞에서 옷을 훌러덩 벗어버려도 흉을 보거나 부끄러울 게 없다.

시인 도종환은 “가구”라는 시로 부부관계를 나타내기도 했다.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있다. 장롱이 그랬듯이/ 오래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시어 속에 삶의 생기가 없다. 칙칙하고 무생물같은 느낌이다. 기대나 기쁨도 없다. 행복한 감정도 없다.
우리 부부는 30여년전에 자개로 만든 장롱을 구입한 일이 있다. 아내가 갖고 싶어 했던 자개장이었다. 내 딴엔 큰마음 먹고 구입했다. 아내는 그 자개장롱을 바라보며 얼마동안 행복해 했다. 표면에 박혀있는 자개로 만든 사람들이며 송아지모양 그리고 각종 동물들을 감상하고 계수도 하며 마냥 즐거워했다. 그 장롱은 겉모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이불이며 각종 옷가지를 걸기도 하고 쌓아놓기도 하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더니 시들해지고 말았다. 이제는 쳐다보는 일도 관심도 없다. 그렇게 좋아했고 사랑했었는데도 말이다.

접시꽃같은 사랑에서 오래된 가구와 같은 사랑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게 부박한 부부간 사랑이다. 내 아내도 나에 대해서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접시꽃이 아니라 하늘같다던 남편을 목석같은 가구쯤으로 사랑이 타락하지나 않았는지?
가족이니까 괜찮겠지, 잔소리를 계속해대도, 조금 큰소리를 친다해도 이해하겠지, 말을 안해도 알겠지 하는 가족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기대들이 문제인 것이다. 비합리적인 습관에 익숙해지며 많은 노부부들이 무덤덤하게 살아간다. 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입만 열면 잔소리이고 지적이고 교훈이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행복해야 할 가정에 웃음이 없다. 냉기가 도는 거실에는 TV소리만 들릴 뿐이다. 모두가 관계를 맺고 사는데 나이가 들수록 아집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서툴고 미숙한 것이다. 2인3각 경기로 한평생을 달려 오는데는 즐거움과 행복이 있었다면 상처와 오해 또한 교직되어 있을 것이다.

요사이 회식장에서 건배사로 ‘오이지’를 외치기도 한다. “오해를 이해로 풀면 지금부터 행복”이라는 다짐이다. 그래도 배우자를 바꾸어 보려는가. 바꾸어 보았자 그놈이 그놈이다. 언덕을 피하려하지만 태산이 기다리고 있다. 대박을 바라다가 쪽박을 찰 뿐이다.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에 이런 것이 있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리 없다. 저안에 태풍 몇 개/천둥 몇 개/벼락 몇 개’
지금까지 맞추며 살아온 놈, 천둥 맞고 벼락 맞으며 정으로 농익은 놈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오이지”를 외쳐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