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은 부모가 쏜 화살이라고 한다.
자녀들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노년을 슬프게 한다.
지난해 미국에서 순회강연 중 만난 P박사, 서울에서 일류대학을 나와 결혼을 하자마자 유학을 갔다. 미국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직장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미국에 그런대로 정착된 사람이다.
그의 부모를 내가 안다. 귀국해서 그의 아들 소식을 전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소식 이다.
만나서 한참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전하였다.
반가운 소식을 얼마쯤 듣더니 불쑥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그래요, 우리 늙은이들 둘이만 지금 살고 있어요. 둘이 살다가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나겠죠. 그리고 혼자 살다가 얼마 있으면 그마저 또 가야죠.” 너무나 이외의 대답이었다.
외국에 있는 아들들에 대한 코멘트나 이야기는 없고 자신들의 말년에 대한 한탄조 서러움이 배어있는 이야기만 있었다.
그 소리가 너무나 처량하게 들렸다.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오매불망 그 아들 잘 되서 돌아와 부모 봉양하기를 바랬지만 그게 아니라 찾아오지도 않는다.
어쩌다 목소리라도 들어보고 싶어 전화를 걸어보지만 그쪽에서 전화한번 걸어오는 일은 없다.
자기들 살기가 바쁜가보다.
부모의 용도는 폐기되었는가? 아니 세상이 각박한 것인가 부모를 챙기지 않는 세대다.
“3번아 5번은 간다.”라는 말이 있다.
시골에서 사는 부모가 떨어져 사는 아들집에 모처럼 찾아 갔다.
며칠 있어보니 자신의 존재가 거추장스럽고 천덕꾸러기 같다. 가정에서 소중히 여기고 귀함 받은 최우선 순위에 서열이 있다.
첫째는 손녀손주다. 둘째는 며느리다. 셋째가 아들이다. 넷째는 기르는 강아지다. 그리고 다섯째가 부모다.
우선순위에서 밀려 제일 꼴찌가 부모인 것이다.
며느리나 손주 아니 강아지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밥도 눈치 밥 먹는 것 같다.
그래 아들한테 “3번아 5번은 간다.” 라고 메모를 남겨 놓고 자기가 살던 시골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말을 어디선가 했더니 한분이 아니란다. 친부모가 5번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5순위는 20여년전 옛날이야기이고 5번에서도 밀려서 겨우 7순위이라고 한다. 5번과 6번의 자리는 장모·장인가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자녀의 효도기간은 4세까지라고 한다. 부모한테 엉기고 따르고 재롱부리고 웃음을 선사할 때 까지이다. 그래서 효도의 90%를 4살까지 마친다는 것이다. 자식농사 잘 지었다고 말들 하지만 그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반문한다. 품안의 자식이라고 한다.
자라 자의식이 생길수록 부모 그림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게 자식이다.
부모는 진땅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땅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다.
전 생애를 받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다.
개발년대를 살아온 사람들. 오직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며 올인 하는 삶을 살았다. 삶 전체를 바쳐 뒷바라지를 했다. 바로 그것이 노후보장과 보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족문화가 바뀌었다. 부모를 모시려 하지 않는다.
부모부양문제는 형제간, 부부간, 갈등 요인이 되기도 한다. 노환의 부모는 더더욱 그렇다. 이제는 노후를 자기 스스로 준비해야만 한다.
어쩌면 오늘의 중년은 부모를 모신 마지막 세대이다. 또한 자녀로부터 배척 받는 1세대 이다. 그것을 모르고 노년을 맞이하면 초라하다. 그리고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다. 노년을 스스로 준비해라.
그래서 은퇴 준비는 잘나가는 중년의 가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준비된 가정의 노년이 아름답다.
그러나 중년에 준비된 노년은 더더욱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