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사는 P라는 의사 친구가 있다.
어느 날 공부는 뒷전인 채 놀기 좋아하는 아들한테 채근을 했다.
“아들아 너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 훗날 아빠처럼 큰 차도 타고 콘도도 갖고 풀장 있는 집에서 살지 않겠냐? 공부 좀 열심히 해라”
아들은 정색을 했다.
“대디 나 큰 차 타지 않아도 되고 콘도가 없어도 되고 큰집에 살지 않아도 돼요. 그런것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난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
P는 아들의 퉁명스러운 말에 충격을 받았다. 일벌레로 돈 버는 일에만 열심인 아빠가 하나도 좋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부러운 대상도 행복의 모델도 아니다. 배고픔 속에서 태어나 배수진을 치고 생존을 위해 살아온 아버지 세대 그리고 풍요 속에서 태어난 아들세대와의 간극이고 차이다. 아버지역할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배워야 한다.
순기능 역기능
“내가 좀 더 일찍 가정의 원리를 알았더라면 더 좋은 남편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었을텐데••••••”
“아침키스”라는 가정행복지침서를 쓰면서 서문에 쓴 글이다. 왜 좀 더 일찍 알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에 가슴이 아프다. 가장으로서 서투르고 미숙해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며 순기능보다 역기능을 한 것이다. 아버지로서 자양분은 커녕 독소를 주기도 한 안타까움이 있다. 때론 허상의 아버지로 제 몫을 못 다한 아쉬움과 회한이 있다. 부모가 있다 하더라도 고아원만도 못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 역할 그냥 알아지는 것은 아니다.
완벽주의를 버려라
일을 완벽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완벽주의자인 경우 가족들의 정서는 망가지게 되어 있다. 탈출구가 없고 숨통이 막힐 것 같다고도 한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는 자녀들이 63%에 이르고 있다.
부모는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격려와 사랑이 아니고 간섭이고 지적이고 비난인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아들이 훌쩍 다 커버렸지만 아들한테 준 상처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를 여러 번 했다.
“너 어렸을 때 내가 잘 몰라서 여차여차••• 했던 일 참으로 미안하구나. 용서해라”
아들이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고 서먹했던 부자관계가 친밀한 관계로 회복되었다.
훌륭한 자녀는 완벽주의 부모 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도 너와 같이 때로는 실수도 하고 실패를 한다. 그런 것을 인정 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을 가진 부모 밑에서 건강하고 훌륭한 자녀가 나온다.
아버지들이여! 교훈적이고 교과서적인 이야기는 줄여라.
그 대신 격려의 말, 기를 살려주는 말인 Plus언어를 많이 하라. 오늘의 아들모습이 아니라 20~30년 후 훌륭하게 된 그 모습을 그리며 칭찬을 하라. 말이 씨가 된다. 아버지의 입술이 자녀를 축복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