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한다

[[제1417호] 2014년 6월 21일]
자식은 부모가 베푸는 것의 1/10 아니, 1/100만 해도 효자 소리를 들을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라면 모두를 희생하고 바친다. 자식을 위해 가슴 쓸어내려 보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고, 자녀 때문에 눈물 흘려보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으랴. 부모와 자식 간의 끈끈한 관계는 사랑과 희생과 믿음으로 엮인 삼겹줄과 같다. 그런데 그 끈끈한 사랑이 식어가는 부박한 세상이 되고 있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자식이 부모를 버리는 것이 흔한 세상이 되었다.

한 할머니의 고달픈 삶이 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었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찌든 가난에 피붙이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재혼은 생각지도 못했다. 찌든 가난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아들 하나 바라보며, 아들을 키우는 재미에 고생도 잊어가며 열심히 뒷바라지 하며 살았다.

오로지 아들을 바라보며 울고 웃었고 그곳에 소망이 있었다. 힘들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언제나 아들이 위로가 되었다. 청상과부로 힘들게 살아온 이 여인, 이제는 아들이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고 떨어져 살게 되었다.

애지중지 키워 온 아들이건만 결혼시킨 후 점점 소원해져 갔다. 할머니는 손자가 보고 싶었지만 찾아오는 일이 없다. 아들도 옛날의 내 자식이 아니었다. 섭섭한 마음이 때때로 엄습해 왔지만 혼자서 접어야만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연락이 없다. 전화 연락도 되지 않는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봤지만 들리는 것은 부모를 버리고 외국으로 갔다는 소식뿐이었다. 자식 하나가 소망이었건만 그 소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기구한 삶, 청상과부로 백발이 된 여인, 지금은 쇠잔한 기력에 허리마저 굽었다. 찌든 가난으로 살아 온 세월의 흔적들이 깊은 상흔이 되어 얼굴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움푹 팬 눈 자락은 숱하게 겪은 풍상을 말하고 있다. 덕지덕지 누더기 같은 찌그러져 가는 방, 그 쪽방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병고에 시달리며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다. 그런데도 양로원이나 다른 곳으로 옮기려하지도 않는다.

“왜 이사를 안 가려고 하느냐” 물어봤더니 혹시라도 자식이 찾아올지 모른다고 한다. 주소가 달라지면 못 만날까봐, 못 옮긴다는 안타까운 사연이다.

자식이 무엇이기에 어미는 오매불망 자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자식을 위해서라면 가시고기 같이 자기를 산화하는 것이 부모인 것을, 자식들이 알 수 있을까? 연락이 뚝 끊어져 소식이 없는 아들이 그래도 보고 싶은 것이다. 가족의 정, 아니 모자의 정이 가슴 시리도록 그리운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버렸건만 그 자식을 못 잊는 게 부모다. 자식의 무소식이 어미의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힌 것이다. 자식의 목소리라도 죽기 전 한 번 들을 수 있다면 한이 없겠다며 눈물짓는다. 외로움과 병마 속에 소외된 채 오늘도 한 많은 삶을 이어간다. 자식을 위해 사랑은 쏟아붓는 것, 그것은 모성애다. 행복은 부모를 참으로 공경하며 손잡아 주는 그 속에 흐른다. 이 각박한 세상, 부모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다. 정이 그리운 것이다. 가족 간의 끈끈한 정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