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아내가 요구하면 나는 항상 OK
[[제1507호] 2016년 6월 4일]
좀 더 일찍 가정의 원리를 알았더라면…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잘해주지 못한 아쉬움과 회한이 나에게는 있다. 한평생을 한 여자와 지지고 볶으며 살아오는 동안 잘못한 일이 어디 한두 가지였을까?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아내에게 잘한 일이 한 가지는 있다. 아내가 무엇을 해 달라고 할 때마다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요구하든 항상 “OK!”를 했다. 그 한가지만 보아도 나는 최고 남편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이다. 아내가 무엇을 요구하면 나는 정말로 들어 주고 싶어서 “그래, 해보자.”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일주일쯤 지나면 50퍼센트는 해 줄 필요가 없어진다. 일주일이 더 지나면 나머지 50퍼센트도 잊어버리게 된다.
우리 부부가 아직 젊을 때였다. 신문을 보던 아내가 말했다.
“여보, 우리도 세계 일주 한 번 하자.”
나는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OK!”를 했다. “그래, 가자. 언제 갈까?”
아내는 금방이라도 세계 일주를 떠날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한껏 부풀었다. 그러나 세계 일주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가 더 잘 알까? 아마 나보다 아내가 더 잘 알 것이다. 당장 직장은 어떻게 할 것이며 아이들은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결국 이런저런 문제에 부딪쳐 세계 일주의 꿈은 접고 말았다.
하지만 아내는 “그래, 해 보자”라는 내 대답을 듣는 순간만큼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어떤 부탁을 하든 “그래, OK!”하는 남편이 고맙고 ‘아, 남편이 내 생각을 존중해 주는구나. 나는 지지해 주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흐뭇해진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받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어차피 이주일만 지나면 해 줄 필요가 없어진다. OK! 할 때 기분 좋고 뒤에 해줄 필요도 없고 모두가 좋다.
그런데 만약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면 어땠을까?
“꿈 깨라, 꿈 깨! 우리 형편에 세계 일주는 무슨 세계 일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냉수 먹고 속 차려!”
어차피 못 갈 세계 일주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아내는 상처 입었을 것이다. 결국 갈지 안 갈지도 모르는 세계 일주 때문에 부부 갈등만 깊어지게 된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힘 안 들이고 그저 한마디로 얻을 수 있는 엄청난 불로소득이 있는데도 그것을 몰라 사랑의 가계부에 적자를 쌓아 간다.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은 부부간 대화의 장벽이 된다.
“말해 봐야 뭘 해요, 내 입만 아플 걸. 뭘 더 바라겠어요?”
상담을 요청해 온 사람들에게 마음을 터놓고 배우자와 대화할 것을 권하면 이렇게 손사래를 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번번이 거절당했던 경험 때문이다. 말해 보았자 들어줄 리도 없고 퇴짜 놓을 게 뻔한데 괜히 자존심만 구기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런 일들이 여러 번 반복되면 부부 사이는 냉랭하게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남편들이여, 아내가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면 무조건 “OK!”를 하고 보자. 아내 기분좋고 나에게도 좋다. 왜? 이주일만 지내면 다 무효가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