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유효기간

[[제1538호]  2017년 2월  18일]
유효기간이란 말이 있다.

무역을 할 때 신용장(L/C)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계약된 물건의 선적을 지정된 기간 내에 반드시 이행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약이나 식품에서는 유효기간이 중요하다. Expiry Date이다. 여권이나 신용카드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기간이 지나면 쓸 수가 없다. 가끔 결혼한 딸이 집에 오면 냉장고를 뒤진다. 그리고 내 아내의 허락도 없이 유효기간이 며칠 지난 음식들을 버려 버린다.

아내가 왜 그 아까운 것 버리냐며 야단이다. 그러면 “엄마, 유효기간 지난 것들은 먹으면 안 돼.” 제 어미가 며칠 지난 것은 괜찮다고 하면 “엄마 약사 맞아?” 오히려 큰소리 치고 훈계다. “얘야 그런 거 먹어도 안 죽는다. 우린 그런 것 다 먹고 살아왔어. 곰팡이 끼어도 걷어 내고 털어 내고 먹고 살았다고. 아니 그런 음식조차 없어서 못 먹었지, 있기만 하면 언감생심이었다.” 모녀가 서로 너무 다른 문명권에서 살고 있다. 현대판 젊은이들은 아이 키우는데도 극성스럽게 유난을 떨기도 한다.

어느 시어머니가 손자한테 간식을 먹였다. 그것을 본 며느리가 아이가 먹은 포장용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놀라는 표정이다. 새침하더니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유효기간이 조금 지난 것을 먹였던 것이다. 이런 때 시어머니 심정이 어떨까? 당혹스럽고 민망하고 난감할 수밖에 없다. 곤혹스러워도 별 수가 없다.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물론 유효기간은 지켜야 하고 해로운 것은 안 먹이는 게 좋다.

우리 집 딸들을 보니 아이들한테 못 먹게 하는 음식도 많다. 각종 맛있는 음료 등 금기 식품들도 많다. 생후 몇 개월까지는 뭘 먹이면 안 되고 돌전에는 뭐가 안 되고…. 현대판 어미들은 아이들도 유별나게 기른다는 생각이 든다.

“너희들은 이걸 어떻게 아니?” 지식과 정보의 소스는 만물박사 스마트폰이다. 블로그나 카페도 많다. 요리나 육아에 부모의 조언보다 모바일 앱이 우선이다. 정보와 지식이 넘쳐난다. 그러니 어른들의 이야기는 귀띔도 안한다. 그런 조언이 필요도 없다. 부모들과는 정말이지 달라도 너무 달라서 부딪힌다.

손자 손녀들은 나를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나를 잘 따른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제 어미가 못 먹게 하는 것을 먹고 싶다면 나는 무조건 사준다. 콜라나 사탕도 가리지 않고 사준다. 물론 내 딸은 모른다. 제 어미가 안보는 곳에서 사주니 말이다.

제 어미는 안 먹이겠지만 나는 사주고 먹인다. 유효기간 같은 건 보지도 않는다. 내 자식이 아닌데 무슨 관계가 있나. 안 먹일 이유가 없다. 손자들한테 내가 인심을 잃을 필요가 없다.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손자가 집에 못 오게 하는 최신 버전이 있다. 유효기간 지난 포장지의 음식을 며느리 보는데 슬쩍 먹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