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일벌레와 완벽주의

[[제1608호] 2018년 9월 1일]
외국에 사는 P라는 친지가 있다. 그는 수입이 좋은 의사다. 공부는 뒷전인 채 놀기만 좋아하는 아들이 있어 어느 날 채근을 했다.

“아들아 너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 아빠처럼 큰 차도 타고 콘도도 갖고 풀장이 있는 집에서 살 수 있지 않겠니? 그러니 공부 좀 열심히 해라”

그 말을 들은 아들이 정색하며 말했다.

“대디. 난 큰 차 타지 않아도 되고 큰 집에 살지 않아도 되요. 콘도 그런 것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난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

P씨는 아들의 퉁명스러운 말에 충격을 받았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일벌레처럼 사는 아빠가 하나도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부러운 대상도 행복의 모델도 아니다. 찌든 가난 배고픔 속에서 태어나 배수진을 치고 살아온 아버지 세대다. 돈 없이 유학 와서 갖은 고생에 아르바이트 하며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성을 쌓았다. 그러나 아들은 풍요 속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을 모르고 자랐다. 헐벗고 굶주림 속에서 빵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아버지 세대, 그리고 빵 속에서 태어나 물질적 결핍을 모르고 자란 아들 세대와의 간극이고 문화 차이다. 아버지 역할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배워야한다.

일을 완벽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완벽주의자인 경우 가족들의 정서는 망가지게 되어 있다. 완벽한 것은 좋으나 완벽주의는 나쁘다. 탈출구가 없고 숨통이 막힐 것 같다고도 한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는 자녀가 63%에 이르고 있다. 부모는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격려와 사랑이 아니고 간섭이고 지적이고 비난이다.

나도 그랬다. 서투르고 미숙했던 것이다. 내가 원하는 아들이 되기를 바랬다. 아들이 훌쩍 다 커버렸지만, 아들한테 준 상처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를 여러 번 했다.

“너 어렸을 때 내가 잘 몰라서 했던 일 참으로 미안하구나. 용서해라.”

아들이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고 서먹했던 부자관계가 친밀한 관계로 겨우 회복되었다. 훌륭한 자녀는 완벽주의 부모 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도 너와 같이 때로는 실수도 하고 실패를 한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한다. 그런 것을 인정할 줄 아는 개방적인 마음을 가진 부모 밑에서 건강하고 훌륭한 자녀가 나온다.

아버지들이여! 교훈적이고 교과서적인 이야기는 줄여라. 그 대신 격려의 말, 기를 살려주는 말을 하자. 힘 빼는 말이 아니라 플러스 언어를 쓰자. 오늘의 아들 모습이 아니라 20~30년 후 훌륭하게 될 그 모습을 그리며 칭찬을 하자. 그리고 기도해 주는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 아버지의 입술이 자녀를 축복하는 축복의 샘물이 되자.